이성애-번지 없는 주막 우리 민족은 유목민이 아닌데도, 일제강점기 때, 어쩔 수 없이 집시처럼 떠돌아 다녀야만 했다.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내리는 그 밤이 애절 구려/ 능수버들 채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이 부른 이 노래, ‘번지 없는 주막’은 당시 헐벗고 굶주리던 우리 동포들의 통한(痛恨)을 담은 것이었다. 나라가 없는데, 어찌 주거할 집이 있겠는가. 그래서 주막에도 문패와 번지수가 없었다. 1940년.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작사가 박영호(필명 처녀림·불사조)는 태평레코드사의 문예부 부원들과 함께 백두산에 오른다. 힘든 등산길이었다. 백두산은 역시 민족의 성산(聖山)답게 가파르고 험준한 고개와 골짜기가 앞을 막았다. 일행이 산 중턱에 도착했을 때, 비를 만났다. 그들은 지친 나머지, 비도 피할 겸 해서 어느 주막에 들렀다. 이른바 ‘아리랑 술집’…. 백두산의 첩첩산중에 있는 이름 모를 주막집이었다. 통나무를 베어 흙을 발라 추위와 비바람을 겨우 막을 수 있을 만큼 얼기설기 지은 집이었다. 하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주막 주인은 그래도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리하여 밤이 으슥하도록 술잔을 기울인다. 도토리 술은 도토리를 가루로 빻아 누룩에 담근 술이다.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는 불같은 정이였소/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었소/ 못 믿겠네 못 믿겠네 울던 사람아./ 깨무는 입술에는 피가 터졌소/ 풍지를 악물며 밤비도 우는구려/ 흘러가는 타관길이 여기만 아닌데/ 번지 없는 그 술집을 왜 못 잊느냐.’ 밖에는 여름비가 줄줄이 퍼붓고 있었다. 호롱불을 줄이면서 비를 바라보고 있던 박영호는 번지 없는 주막의 노래시를 쓴다. 기가 막힐 심정이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맨 먼저 해방가요 제1호 ‘사대문을 열어라’를 쓰게 된다. 이때의 비참한 울분을 노래에 쏟았던 것이다.